판소리는 살아있다. 브레히트는?
판소리는 살아있다.
이자람님의 사천가를 보고왔다. 예술의전당도 처음 가보았고, 2층ㆍ3층에 난간형 객석이 있는 소극장도 처음 보았고, 아마 판소리 공연도 처음 보았다. 판소리라는 것이 원래, 이야기꾼이 나와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판은 요즘 없지 않은가. 혹은 전해져 내려온다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근데 이자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 시대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소리로 만들어내어, 두 시간 동안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판소리는 살아있다.”
사천가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을 번안(?)한 작품이다. 내용이 새로 각색되었다기 보다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직업 정도가 바뀐 정도. 탑골팰리스를 방문하는 신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천가는, 우리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삶들, 그 인간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신신자유주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불리며, 공중에서 돌아가는 경제문제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는 테크놀로지로서, ‘개인’이라기보다는 걸어다니는 1인 기업 ─즉 개업─으로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사천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구라파 브씨아저씨’(브레히트)의 놀라온 통찰력과 그것을 잘 해석해서 보여준 이자람님의 능력. 약간 마초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신들은 정말 최고의 해석(?)이었다!
브레히트는?
브레히트 서사극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극에 몰입되어 웃고 떠들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또 박수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 이 ‘연극’은 ‘연극’으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네, 뭐라는거지?, 저게 무슨 뜻이야?, 이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무대 위에 펼쳐지고 이야기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그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 그렇게 자기존재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낯설게하기’로 통칭되는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는데, ‘사천의 선인’의 경우 구라파 연극의 배경이 사천으로 설정된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유럽의 자본주의를 중국의 시골마을에 입힘으로서, 사회 전체를 낯설게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대사를 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며, ‘쟤 왜 저래?’라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또 유명한 것이, 대사를 하기 전에 지문을 함께 읽는 것. 예컨대, 대본에 ‘(슬픈 표정으로)’라는 지문이 있을 때, 무대 위의 배우가 그 지문을 먼저 읽고 대사를 하는 식이다. 이런 단절(?)을 통해, 관객은 극에 쉽게 동화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그 동화에서 빠져나와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어쩌면 판소리는 이미 이런 효과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자람은 사천가의 등장인물들을 놀라운 솜씨로 연기하면서도, 중간중간에 자신은 ‘소리꾼 이자람’임을 언급하며 해설하는 것을 잊지않는다. 판소리에 이런 대목들이 있지 않은가. “그때여 춘향이와 이도령이~♬ 어쩌구저쩌구 하는디~♬” 그래서 아마도 브레히트 서사극과 판소리가 접점을 가지고 왔다고 그 동안 얘기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익숙한 판소리여서 그랬던 걸까? 그런 부분들이 브레히트 서사극에서 배우들이 지문을 읽어주던 충격처럼 다가오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레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또, 아마도 중간중간에 등장해서 근엄한 메세지를 요상한 자세와 댄스로 전달했던 3인의 배우는, 아마도 그런 효과들을 의도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삽입된 웃기는 장면 정도로만 느끼졌던 것 같다. “사랑은 언제나 고귀하고”라는 노래를 1초도 버티기 힘든 차력자세로 들려주는 식이었지만, 낯설어지기 전에 웃음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배우들이 좀 더 진지하고 엄숙한 상태에서 그것들(그 근엄한 대사들)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고귀해?”. “사랑은 희생이라고?”, “누가 이런 말을 하는거지? 꼰대마초!” 관객들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사천이 너무 한국화되었던 것도 아쉬웠고, 늘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마무리하는 재판 장면도 뭔가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에게 재판장의 청중이 될 것을 강요하여, 오늘 이야기에 대한 판결을 할께 할 것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판결을 하고 갈 것을, 혹은 그 고민과 생각을 지금부터 시작할 것은 준엄하게 명령하는, 뭐 그런 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마무리에서 약간의 각색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천가는 재판장에 다시 나타난 신들에게 순덕이 사회질서를 고발할 때, “경제문제는 관여하지 않아”라는 무책임한 메세지만을 남기며 허무 속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만들어놓은 이야기 그대로이다. 그리고 아마 그 시대에 유효한 비판이었을 거다. 경제문제(하부구조)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잘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움직임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
그러나 사천가의 1부에서 소름끼치도록 잘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지금은 모두들 날 때부터 ‘경제문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개인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시적인 경제시스템(WTO/FTA 따위)도 있지만, 뼛 속까지 우리 삶의 원칙이 되어버린 ‘경제’라는 삶의 양식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이란 것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집 평수 넓히려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와서 신들이 관여하지 않으며 떠났으야 하는 그 무엇은 ‘경제문제’보다는 ‘개인들의 삶의 양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할 때, 판소리가 다섯마당을 그저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브레히트의 이야기가 고전으로 박제화되지 않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미묘하게 복잡하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에서 브레히트까지는 잘 왔지만, 브레히트에서 다시 좀 더 미묘하게 구분되는 우리 시대로는 넘어오지 못한 것 같은 느낌. 또 판소리라는 양식은 잘 살아가고 있는데 비해,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는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린 느낌. (그렇다고 이게 누군가의 책임일 수는 없고, 그저 내가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또 나라도 하고 싶은ㅎㅎ)
사천가 이 후에 다시 판소리와 브레히트의 만남이 시도된다면, 판소리를 오늘 날로 살려내는 것과 함께, 브레히트를 오늘 날로 살려내는 것도 함께 잘 되었으면 좋겠다. 왠지 이자람님이 멋지게 해주실 것 같아! 기대기대 @.@ 아무튼, 오랜만에 공연봐서 너무 좋았고, 이자람님 공연이어서 더욱 좋았고, 브씨 아저씨 이야기도 좋았고. 이 공연 강추!!! 아쉽게도 7/11을 마지막으로 끝났는데, 10월달에 전주소리축제에서 다시 한 번 한다고 하니, 땡기는 분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오랜만에 집회
토요일 집회 때 모습. 수줍게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을 디온이 스마트폰(!)으로 찍어주었다. 스마튼폰의 위용 앞에 지난가던 이들은 속도를 높여 스스로 아웃포커싱 되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하나 장만해야 하나. 반셔터도 된다는데.
아웃포커싱된 사람들 밖으로는 자전거와 깃발을 연결해서 만든 ‘8당은 에코토피아‘ 부스가 있다. 이 날 최고인기의 부스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의 인기는 곤뇽이 만든 ‘멍청이짓 그만’ 깃발. 그 분을 생각하며 삽을 그리니, 꼭 그 분을 닮은 삽이 나왔다고 한다.
자전거타고 팔당까지 갔다가 갑자기 필 받아 시작된 ‘8당은 에코토피아’ 홈페이지도 갑자기 만들었다. 드루팔drupal을 거의 처음 이용해봤는데, 지금은 환상적이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게시판은 저리가라, 입체적인 홈페이지란 이런 것. 좀 더 친해줘서 남도 줘야지ㅋㅋㅋ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사람과 개발자
개발자의 전화
나는 개발자. 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홈페이지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는 문의. 도메인을 물어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내 컴퓨터에서는 열리지도 않는다. 악성코드가 심어져 있다는 메세지만 달랑.
“해킹 된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그럼 어찌해야되나요?”
“─.─ 일단 제가 한 번 살펴볼께요.”
코드를 검사해보니 문제가 되는 파일이 몇 백개는 되는 것 같다. 감염된지도 벌써 몇달된 듯, 제대로 된 백업본이 남아 있을리도 없다. 한시간은 걸릴 것 같은 작업량.
“3~4시간 정도는 작업을 해야 복구가 될 것 같아요. 그것도 이전처럼 완벽하게 복구가 될 수 있을지는 더 살펴봐야되구요.”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시리 걸리는 시간을 뻥튀기 해본다. 이제 막 오늘 계획했던 나의 일을 시작하려던 참이였는데, 나의 시간이 침범당한 것 같아서 못된 심보가 발동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당신의 전화 반대편에서 어떤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시위로서.
한시간의 작업으로 왠만한 것은 다 걷어낸 것 같은데, 이상하게 홈페이지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 케이스. 코드를 더 꼼꼼히 살펴보고, 구글링을 하기 시작한다.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면 해결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물러서지 못하는 개발자들의 성미.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 몇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파일 하나를 삭제하자 그제야 나타난 홈페이지.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시민모임”이라고 써있다.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개발자
사실 처음에 전화를 받으면서도, 어느 단체의 누구인데 어떤 홈페이지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서로 확인을 했던 것 같다. 그래, “일제고사”라는 말도, “해직교사”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때는 그냥 ‘문제가 있어서 전화를 건 사람’과 ‘할 일이 쌓여있는데 이 전화를 받고 무언가 해결해줘야 하는 개발자’의 관계만이 있었고, ‘일’은 그렇게만 진행되었다. 4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일제고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고,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또 우리는 왜 그렇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전화로만 연결되어 무언가 문제가 있어 부탁하는 사람과 약간의 불평불만과 함께 또 하나의 업무를 기계처럼 처리하는 개발자의 관계로만 만났을까. 단추는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개발자이다. 그러나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개발자이지는 못하다. 그 둘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개발자가 될 수 있을까?
선거와 정치
삶=정치
살아간다는 것은 정치한다는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아니 무인도에 혼자 살아가더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나’라는 경계 밖의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그 자체로 정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은 정치 중의 정치가 아닐까. 설거지 하나를 하는 것도 정치일 수 밖에 없다. 근데 여기서 정치가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삶=정치’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등식을 은폐하는 몇 개의 공식이 있다. 우선 ‘정치적 동물’이라는 언표. 이 말은 마치 삶은 중립적이고 스스로 가능한 것처럼 신비화한다. 먼저 삶이라는 것[동물]이 있다. 그리고 정치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정치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반대편에서, 정치에 삶을 종속시키는 사고방식이 있다. 왜냐하면, 정치가 삶을 만들어내는 권력의 역사가 계속되어왔고,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서 혁명가들은 정치에 모든 삶을 걸었던 것이다. 정치가 삶을 만드니까, 삶은 정치를 장악할 때 내 것이 된다. 이 고리타분한 운동에서 삶은 찾아보기 힘들다. 항상 ‘정치적 올바름’이 내세워지면서 각자의 삶은 혼자서 몰래 평가하며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양자 모두에서 정치와 삶은 분리된다. 모든 행위는 순수한 욕망이거나 불순한 목적일 뿐이다.
하지만 내게 삶은 언제나 정치였고, 욕망과 목적은 분리되지 않았으며, 삶과 운동은 같은 표면에 존재해왔다. 또 누구든지 ‘삶=정치’라는 공식을 떠올리며 살아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정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그와 트위터는 매우 정치적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정치를 포기하는 행위로서 선거를 생각해왔던 것이다.
선거
그런데 촛불시위를 경험하고 이번 지방선거를 맞이하면서, 약간은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선거도 훌륭한 정치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3월에 보았던 <하비밀크>라는 영화가 내게 어떤 감응을 남겼던 것 같고1, 그 전에는 광화문에 촛불 들러 나간다는 생각으로 주경복에게 한 표를 던지러 먼 길을 가던 경험도 있었다. (주소지가 딴데라서 :) 이번 지방선거가 정치로 느껴지는 것도, 누군가가 당선되어서 그가 나 대신 ‘정치’를 해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우리를 우회하여 진행되고 있는 변화들 ─ 특히 우리 삶과 그 조건들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정치’들을 고발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을 때, 이 선거는 살아있는 정치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번 선거 또한 정치를 죽이는 ‘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에 또한 선거 이 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또 그래서 나도 하나의 정당을 선택해서 활동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거나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삶들과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러므로, 나의 삶과 분리된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삶정치로서 정당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이와 동시에), 2년 뒤에 있을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내가 또 참여하게 될지 어떨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시민과 심상정
선거를 시작할 즈음에, 어떤 친구가 내게 ‘단일화가 될까?’라고 물었는데, 뭔가 ‘선거=단일화쇼’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했었다. 정책과 공약, 정당과 인물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단일화만이 질문되는 씁쓸한 현실. 결국 지난 주말, 심상정이 경기도지사 후보에서 사퇴하며 유시민을 지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경기도민도 아니고, 두 사람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뭐, <항소이유서>의 유시민도 알고 있지만 옛날 얘기일 뿐이고,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성폭력 사건을 묵살하고 넘어간 정치인 유시민과,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며 의료보험 1종 환자들의 무상의료를 없앤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으로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심상정은? 촛불시위 거리에서 만났을 때, 칼라TV 앞에서 약간 쇼하는 분위기를 연출해서 ‘이런게 정치인인가’ 생각했던 비호감도 살짝 있지만, 훌륭했던 국회에서의 활동과 신뢰할만한 진보정치인으로서 기억한다. 무엇보다 지난 번 대선 때 그가 민노당 후보로 나왔다면, 투표에 대해 좀 더 고민해봤었을 것이다.
서울사는 내가 경기도지사 선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주 4대강 저지농성이 한창 진행중인 팔당 두물머리에 자전거로 다녀오면서이다. 두물머리는 지역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4대강 삽질이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사업지구이다. 이 후 예상되는 절차는 이렇다. 아직 공사와 보상을 위한 현장측량이 진행되지 못했는데, 이 측량을 위해 공권력이 투입될 것이다. 지난 번에도 한 번 투입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주민들의 저항으로 측량을 저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선거가 진행 중이라 잠잠하지만 선거가 종료되면 바로 공권력이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때 가서 막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강제로 측량이 진행되고 나면, 그 다음 절차는 행정대집행이다. 강제로 부수고 철거하고 쫓아내는 것이다. 특히, 행정대집행이 진행된다면 그 막대한 비용을 주민들에게 청구하기 때문에 행정대집행까지 실제로 저항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2 근데 이 행정대집행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이 지자체장, 즉 경기도지사에게 있다.3 그래서 그 곳 사람들에게는 이번 선거가 삶이 걸려있는 중대한 사건인 것이다. 애초의 정치적 성향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4대강을 죽이는 삽과 콘크리트가 삶을 통째로 매장시키려는 위기 앞에서 모두 유시민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경기도민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때부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왔던 질문이다. 팔당에 가지 않았었다면 당연히 심상정을 뽑았겠지만, 그 이 후에는 고민이 복잡해졌다. 팔당에서의 그 삶들, 그 보드라운 흙과 생명들, 그리고 4대강 사업 전체를 균열내는 것에, 경기도지사 선거가 하나의 중요한 마디가 아닌가하고.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한 표를 호소하던 팔당의 그 목소리가 계속해서 내 안에서 웅얼거리고 있다. 심상정 후보가 사퇴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 하나의 정치를 보고 유시민을 찍었을 수도 있다. 함께 갔던 친구들과 나는, 누가 되던 우리가 싸워서 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말이다.
심상정은 고뇌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녀가 팔당과 함께 싸워왔으며 그들과 함께 호홉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상정은 팔당에서 어떤 말을 듣고 나누었을까?4 또 경기도의 여러 다른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을 것인가? 나는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도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는데, 표를 받는 사람으로서 이번 선거가 자신과 진보정치와 이 시대에 ‘어떤 정치가 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 알 수 없는 그 고통을 짐작만 해 볼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주말을 힘겹게 보낸 진보신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분노도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상황이 어떻게 되던지 간에 나의 고민은 나의 고민대로 정리하면 좋겠지만, 생각이 미처 정리되지 못하고 이대로 투표의 시간이 닥친다면, 나는 유시민에게 한 표를 행사할 것 같다. 물론, 난 경기도민이 아니라서 가상일 뿐이지만.
나의 한 표
나는 지금 용산구에 살고, 투표소는 집에서 5분 거리이다. 내일 아침 일찍 표를 행사하러 갈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이 되서야 도착한 공보물을 2시간 공부하고 나서야(나름 재미도 있었고, 그것들을 꼴라쥬하면 정말 살고 싶은 우리동네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나름의 이유로 한 표 한 표를 결정했다.
- 서울시 교육감: 곽노현
- 용산+@ 교육의원: 최보선
- 서울시의원: 문광덕(민주당)
- 용산구의원: 남기문(민노당) or 황혜원(진보신당) //고민과 토론이 좀 더 필요, 좋은 의견 있으면 주세요.
- 서울시장: 노회찬(진보신당)
- 용산구청장: 성장현(민주당)
- 서울시 비례대표: 진보신당
- 용산구 비례대표: 진보신당
이 포스팅은 투표 전에 ‘나에게 선거란 무엇일까?’ 한번 정리하고, 또 내가 지지하는 후보들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겸사겸사 포스팅 해야겠다 생각만 해오다가, 민노씨의 심상정 사퇴에 부쳐 에 자극받고 촉발되서 쓰는 포스팅이다. 고맙게도 이 블로그를 기억하고 언급해주셔서 :) 또 심상정에 대한 분노와 공격 속에서, 나 또한 하나의 삶과 생각으로 개입하고자 쓰기도 하였고. 그래서 가능하면 여기저기 트랙백이나 덧글로 엮어볼 계획이다.
- 게이운동을 하기 위해 선거에 뛰어든 그는, 때론 나쁜 의미에서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삶과 선거에의 참여 전체가 아주 훈늉한 정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 대추리 행정대집행 모습: 오마이 기사, 이 후 경찰은 행정대집행 비용 2억원을 주민들에게 청구한다 [↩]
- 게다가 “4대강 사업 권한은 중앙정부에 있지만, 지방단체장들이 법적-행정적 절차를 밟아 환경영향평가의 재조사와 준설토 적치장 거부 같은 수단방법을 통해 사업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실상 중단시킬 수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93311&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
- 트랙백을 걸다보니 그녀는 사퇴기자회견을 하기 이틀 전에도 팔당에 있었다. http://minsim.or.kr/blog/191 [↩]
두물머리
언제부턴가 가뭄에 콩나듯 귀한 빨간 날, 게다가 부처님께서 2010년 5월의 금요일을 점지해주시사 맞이하게된 금토일 황금연휴. 평소의 ‘금금금’에 대비되는 ‘일일일’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모두에게 오아시스 같았던 이번 연휴. 빈집 식구들과 자전거에 깃발을 동여매고 팔당으로 발나섰다. 집결지는 광화문 발바리 공원.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작년에 빈집에서 <더불어사는 집> 상영회할 때 오셨던 이현정 감독님도 보인다.
<광화문 발바리 공원에 모인 발바리들>
얘기는 이렇다. 팔당은 1,200만 서울 사람들의 식수가 공급되는 곳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깨끗하다는 아리수.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친환경 유기농’이 유행이 되기 훨씬 전부터, 태생적인 유기농업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30년 역사의 유기농업 단지.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 시절 이 곳을 방문하여 “유기농만이 살 길이라며, 대통령이 되면 청년들이 들어와서 유기농단지가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팔당의 유기농 단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2011년 세계 유기농 대회를 이 곳으로 유치한 바 있다. (겨울철에도 연탄 한 장, 석유 한 방울 없이 지하수의 순환만으로 온도를 유지하는 이 곳의 수막재배는 유명하다고 한다. 딸기맛은 정말 일품이다.)
<팔당을 방문하여 상추 세레머니를 하고 있는 MB와 팔당 유기농대회를 유치하며 만세 세레머니를 하고 있는 문수>
물론, 이들은 이 후 말을 바꾼다. MB는 죽은 강도 벌떡 살아나게 한다는 콘크리트와 삽을 들고 나섰고, 문수는 유기농도 좋지만 무단경작은 좀 정리해야 한다며 까만 헬멧의 공권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수식어들은 거창하다. 강도 살리고, 생명도 살리고, 물도 이용하고, 법도 지키고. 그리고 공원도 만들고, 공연장도 만들고, 자전거 도로도 만든다고. 물과 뭍의 그 경계없음, 그 무─경계에서 생명들의 뒤섞임, 그 도가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창조와 진화의 하모니를, 듣기도 보기도 싫다고, 그 아름다움을 견딜 수 없다고 그 곳에 콘크리트를 부어, 한강둔치 같은 레저공간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4대강의 before & after: 생명의 장인 팔당 두물머리와 죽음의 장인 한강둔치>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찾아간 곳은 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두물머리라는 곳이었다. 두물머리, 그 땅 끝에 서니 이 쪽에서 큰 물 한 줄기, 저 쪽에서 큰 물 한 줄기가 흘러들어와, 뒤섞여 서울로 유유히 흘러 들어간다. 알고보니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다. 두 물이 만나는 곳이라해서 붙여진 이름 ‘두물머리’. 두 물이 만나 새로운 물줄기가 되고, 서로 다른 생명들이 뒤섞여 다시 함께 살아가는 성스러운 장소인 것이다. 이 곳까지 한강의 콘크리트가 연장되고, 춘천의 콘크리트까지 이어지는 것이 4대강의 계획이다.
어느 날 부터, 물을 살리겠다는 ‘친환경 드립’에 자전거도로를 내고 공연장 만든다는 ‘레저 드립’이 추가되더니, 쫄바지와 에얼리언 헬멧, 까만 선글라스로 중무장한 레저 바이커들이 찾아와서, 4대강 찬성집회를 하질 않나, 그게 또 팔당 주민들간의 민─민 갈등으로 언론에 보도되질 않나, 팔당인들의 자전거에 대한 비호감은 급상승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러한 사연 속에 팔당으로의 떼잔차질이 제안되었던 것이다. 생명을 죽이며 만든 자전거 도로 따위 필요없다고. 자전거 도로 반대하며 자전거를 타자고. 자전거의 도로는 콘크리트와 석유로 점철된 자동차의 길을 없애면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우리는 외쳤다.
<남양주 경찰들을 긴장시켰던 우리의 구호들, 차선 하나를 점거한 채 달린다>
전체 4대강 공정률이 20%를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도, 삶의 터전과 삶 그 자체를 지켜나가고 있는 저항으로, 팔당은 아직까지 4대강 공사가 시작되지 못한 유일한 지역으로 남아있다. 이 곳에서 싸움을 시작하자. 이 곳에 죽음의 삽과 콘크리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힘으로 두 물을 따라 부어지고 있는 콘트리트를 걷어낼 수 있도록. 다시 그 힘이 낙동강, 영산강, 금강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자전거도로 반대하며 자전거를 달리고, 콘크리트 공연장에 반대하며 자연 속에서 공연을 하고,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두물머리에서 에코토피아를 개최하자.
그리고 당장은 두물머리에 가보라. 후기를 아무리 열심히 써도, 그 생명들의 경이로움, 그 흙들의 보드러움, 그 강변의 넉넉함, 그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전해지지 않으니. 직접 보고 만지며 느끼자. 지킬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덧, 두물머리에서 함께 보았던 ‘푸른영상’의 짧은 영상 <강의진실>, 슬픔과 분노를 느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