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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to the Imagination

철학 취향 테스트

적린님의 소개로 바로 해봤는데, 질문들이 생각보다 어렵다. 어렵다기보단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선택할 수 없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둘 중 하나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몇 개는 찍다시피 했는데, 왠지 결과는 맞는 것 같아. 신기신기. 근데 이거 꽤 괜찮은 테스트인데, 결과로 나온 철학자들 소개와 책소개까지 해주고. 테스트는 여기! 근데 나와 가까운 철학자들 책으로 소개된 책들은 읽은게 한 개도 없네. 헐.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
| 센스, 감성, 열정
동물적 감각+논리적 이성까지 겸비한 당신은 욕심쟁이, 후후훗! 감각과 동시에 ‘쓰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을 가진 당신.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지만, 이 감각은 명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센스쟁이 타입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적 감각과 함께 빛나는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 가서 미움 사기 십상인 타입+_+? 현대의 직업군에서 꼽자면 ‘디자이너’ 혹은 ‘설계자’에 가까운 이 부류의 철학자는? = 흄, 들뢰즈, 마르크스, 아감벤
『철학 vs 철학』에서는?

8장 어느 경우에 인간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흄과 칸트
15장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헤겔과 맑스
26장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데리다와 들뢰즈
28장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슈미트와 아감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동시에 유명한 회의주의자.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로 흄이 애덤 스미스의 절친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한 가지, 그가 ‘회의주의자’가 된 이유는 ‘시니컬’하거나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광대하게 펼쳐진 우주 앞에서 지적 겸손함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살던 당대에는 초월적인 신 없이 평화와 행복을 상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주 유쾌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죽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성’에 꽤나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는데, 결국엔 ‘이교도’라거나, ‘무신론자’, ‘회의주의자’(이건 사실 꽤 모욕적인 표현이다)라는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후대에 칸트에 의해 정직한 사유가로 재평가되고, 들뢰즈에 의해 감각의 위대함을 보여 준 철학자로 높이 평가받았으니, 니체 말대로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책]

맑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99%는 이 사람을 꼽을 듯. 적을 구워 먹어 버릴 것 같은 열정으로 글을 써 댔던 이 사람은 ‘천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말 놀랄 만큼 면밀한 분석을 수행했으면서도 문학적인 감수성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는다. 맑스의 책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꼼꼼하고 정밀한 분석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걸 가지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역사 전체를 살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맑스의 일상은 가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한다. 가장 수입이 적을 때조차 당대의 중산층에 상응하는 정도였는데, 지출의 무능력과 사치로 인해 먼저 죽은 딸의 관조차 장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활에서도 유능한 ‘천재’란 정말 없는 것인가?
[관련된 책]

들뢰즈
“그는 너무나 굳센 나머지 실망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허무주의적인 세기말에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질병과 죽음에도 역시. 왜 나는 과거에 그에 대해서 떠벌렸던가? 그는 웃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여기 있다. 슬퍼하는 건 너야, 멍청아. 그가 말한다.” (들뢰즈의 죽음 이후 『르몽드』에 실린 리오타르의 추도문)
들뢰즈에 대해 그 자신의 발언을 제외하고, 이렇게나 그와 그의 사유를 잘 표현한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삶의 대가였던 들뢰즈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그냥 부정적인 것일뿐 그로부터 긍정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반성’을 엄청나게 경멸한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시킬 뿐이다!
들뢰즈는 ‘글쓰기’ 그 자체에 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형식의 글쓰기 실험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밤 고원 위에서 별 밭을 우러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을 때 그의 저서 중 아무 곳이나 펴 놓고 읽어 보길 바란다. 말들의 미로 속에서 오바이트하거나, 오만가지로 펼쳐지는 생각의 잔치를 볼 수 있으리라!
[관련된 책]

아감벤
‘벌거벗은 사람들’, 오직 생명 그 자체만 남은 사람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현대사회를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하나의 사태를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통합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철학자는 그렇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호모 사케르’를 현대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호모 사케르’를 드러낸다.
방랑하는 사람들, 자격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을 통해 자유와 대안까지 그려 볼 수 있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철학vs철학』이나, 아감벤의 다른 저서를 보시길! 어쨌든 우리 삶에서 ‘정치’를 사고할 때 주목해야 할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
[관련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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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처하는 자세

성폭력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긴 긴 대화가 끝나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약간은 절망. 그렇지만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될 수는 없잖아. 용산의 활동가들은 철거민들과 무언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데. 물론 그 때부터 시작일 뿐이고. 하나의 사건으로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래도 이 대화가 언젠가는 그 반성이 출발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 계기는 되었을까? 어떻게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좋았을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그 전에 먼저 애정이 있었어야 하는 것일까?

푸코는 언제나 위로의 말을 건네준다.

세네카는 그 예로 어떤 방법으로도 설득이 불가능한 무식한 사람들과 지나칠 정도로 격렬하게 토론하거나, 친구를 개선시키고자 하면서 오히려 비난으로 화나게 만드는 것과 같은 행동에 대해서 거론한다. 그는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그러한 행동에 사용된 수단들이 원래 자기 스스로 제기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용되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다는 점에서 못마땅해한다. 적절하지 못한 질책은 친구를 개선시키기는커녕 상처만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 또한 교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여야 한다. (성의역사3: 자기배려)

대화가 불가능하고 상처만이 증폭될 때 당장의 헤어짐은 필요한 것 같아. 그렇지만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야. 이 공간에서의 헤어짐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와 만남을 의미하고, 또 그 관계는 사실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 관계들을 단절하고 청정지역을 만드는 것이 해결이나 운동이 아니라 관계들의 무게중심 전체를 이동시키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무언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 어떤 경우에는 헤어짐이 아니라 함께함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 사람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의 배치 속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니까. 함께함의 시간,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나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 그도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애정이 필요해. 혁명은 연애다.

사건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아. 다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다음 사건의 조건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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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새벽 5시. 컴컴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안에 홀로 누워 노트북을 켜고 네트에 접속을 하는 순간, 나는 외롭지 않음을 느끼고 무한히 연결됨을 느낀다. 보석같은 존재를 발견할 때, 또 그들과 뒤섞여 새로운 내가 만들어질 때 얼마나 즐거운가.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세상에서 제일 고독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두 개의 시공간이 있다.

거꾸로 “현실”에서의 감각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또 무겁고 어렵다. 그만큼 깊이도 있겠지만. 어제도 오늘도 우리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파하지만, 우리는 차마 “현실”에서 로그아웃하지 못하고 그 상처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상처들이 묵혀진다면 뭐든 되겠지,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두 시공간의 뒤섞임도 있겠지? 촛불시위는 네트에서 형성된 관계를 현실세계로 소환했던 가장 강력한 경험 중 하나이다. 나는 반대로 이 곳에서의 관계들, 무엇보다 “현실”이라는 조건 때문에 지금 닿을 수 없는 친구들을 네트로 불러내서 연결되고 싶다. 예컨대, 팔로우follow하고 싶은 것이다. 그 친구들에게 “현실”에서의 고독을 다소간 강제하면서.

새해 첫 날. 방에 남겨진 자의 고독으로, 또 이제 막 트위터를 개설한 설레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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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xthSense

헐, 우리는 어떤 속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올해는 아이폰이 팔리지만 내년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View subtitles 클릭하면 한글 자막 선택 가능해요)

moya, 댓글2개

연애와 결혼

연애를 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다른 관계들을 제한한다. 종종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나의 두려움, 그의 경계 등)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가가고 섞이고 변화되면 좋을텐데. 물론 모든 다가감은 각각이 하나의 온전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라는 전제도 좀 웃기다. 고정되는 것 보다는 흐르는 것이 좋고, 이것 아니면 저것보다는 이것에서 저것까지가 좋은데.. 여튼 어려운 문제다.

그런 면에서 결혼은 다른 관계들을 더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티켓인 것 같다. 개인적인 면죄부일 수도 있고, 사회적 장치인 것 같기도 하고. 하나의 관계만을 절대화하고 역전불가능하게 만든 다음, 다른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관계를 생산하든 그 하나의 관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오케이다.

moya, 댓글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