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는 살아있다. 브레히트는?
판소리는 살아있다.
이자람님의 사천가를 보고왔다. 예술의전당도 처음 가보았고, 2층ㆍ3층에 난간형 객석이 있는 소극장도 처음 보았고, 아마 판소리 공연도 처음 보았다. 판소리라는 것이 원래, 이야기꾼이 나와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판은 요즘 없지 않은가. 혹은 전해져 내려온다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근데 이자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 시대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소리로 만들어내어, 두 시간 동안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판소리는 살아있다.”
사천가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을 번안(?)한 작품이다. 내용이 새로 각색되었다기 보다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직업 정도가 바뀐 정도. 탑골팰리스를 방문하는 신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천가는, 우리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삶들, 그 인간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신신자유주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불리며, 공중에서 돌아가는 경제문제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는 테크놀로지로서, ‘개인’이라기보다는 걸어다니는 1인 기업 ─즉 개업─으로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사천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구라파 브씨아저씨’(브레히트)의 놀라온 통찰력과 그것을 잘 해석해서 보여준 이자람님의 능력. 약간 마초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신들은 정말 최고의 해석(?)이었다!
브레히트는?
브레히트 서사극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극에 몰입되어 웃고 떠들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또 박수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 이 ‘연극’은 ‘연극’으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네, 뭐라는거지?, 저게 무슨 뜻이야?, 이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무대 위에 펼쳐지고 이야기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그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 그렇게 자기존재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낯설게하기’로 통칭되는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는데, ‘사천의 선인’의 경우 구라파 연극의 배경이 사천으로 설정된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유럽의 자본주의를 중국의 시골마을에 입힘으로서, 사회 전체를 낯설게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대사를 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며, ‘쟤 왜 저래?’라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또 유명한 것이, 대사를 하기 전에 지문을 함께 읽는 것. 예컨대, 대본에 ‘(슬픈 표정으로)’라는 지문이 있을 때, 무대 위의 배우가 그 지문을 먼저 읽고 대사를 하는 식이다. 이런 단절(?)을 통해, 관객은 극에 쉽게 동화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그 동화에서 빠져나와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어쩌면 판소리는 이미 이런 효과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자람은 사천가의 등장인물들을 놀라운 솜씨로 연기하면서도, 중간중간에 자신은 ‘소리꾼 이자람’임을 언급하며 해설하는 것을 잊지않는다. 판소리에 이런 대목들이 있지 않은가. “그때여 춘향이와 이도령이~♬ 어쩌구저쩌구 하는디~♬” 그래서 아마도 브레히트 서사극과 판소리가 접점을 가지고 왔다고 그 동안 얘기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익숙한 판소리여서 그랬던 걸까? 그런 부분들이 브레히트 서사극에서 배우들이 지문을 읽어주던 충격처럼 다가오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레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또, 아마도 중간중간에 등장해서 근엄한 메세지를 요상한 자세와 댄스로 전달했던 3인의 배우는, 아마도 그런 효과들을 의도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삽입된 웃기는 장면 정도로만 느끼졌던 것 같다. “사랑은 언제나 고귀하고”라는 노래를 1초도 버티기 힘든 차력자세로 들려주는 식이었지만, 낯설어지기 전에 웃음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배우들이 좀 더 진지하고 엄숙한 상태에서 그것들(그 근엄한 대사들)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고귀해?”. “사랑은 희생이라고?”, “누가 이런 말을 하는거지? 꼰대마초!” 관객들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사천이 너무 한국화되었던 것도 아쉬웠고, 늘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마무리하는 재판 장면도 뭔가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에게 재판장의 청중이 될 것을 강요하여, 오늘 이야기에 대한 판결을 할께 할 것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판결을 하고 갈 것을, 혹은 그 고민과 생각을 지금부터 시작할 것은 준엄하게 명령하는, 뭐 그런 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마무리에서 약간의 각색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천가는 재판장에 다시 나타난 신들에게 순덕이 사회질서를 고발할 때, “경제문제는 관여하지 않아”라는 무책임한 메세지만을 남기며 허무 속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만들어놓은 이야기 그대로이다. 그리고 아마 그 시대에 유효한 비판이었을 거다. 경제문제(하부구조)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잘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움직임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
그러나 사천가의 1부에서 소름끼치도록 잘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지금은 모두들 날 때부터 ‘경제문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개인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시적인 경제시스템(WTO/FTA 따위)도 있지만, 뼛 속까지 우리 삶의 원칙이 되어버린 ‘경제’라는 삶의 양식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이란 것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집 평수 넓히려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와서 신들이 관여하지 않으며 떠났으야 하는 그 무엇은 ‘경제문제’보다는 ‘개인들의 삶의 양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할 때, 판소리가 다섯마당을 그저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브레히트의 이야기가 고전으로 박제화되지 않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미묘하게 복잡하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에서 브레히트까지는 잘 왔지만, 브레히트에서 다시 좀 더 미묘하게 구분되는 우리 시대로는 넘어오지 못한 것 같은 느낌. 또 판소리라는 양식은 잘 살아가고 있는데 비해,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는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린 느낌. (그렇다고 이게 누군가의 책임일 수는 없고, 그저 내가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또 나라도 하고 싶은ㅎㅎ)
사천가 이 후에 다시 판소리와 브레히트의 만남이 시도된다면, 판소리를 오늘 날로 살려내는 것과 함께, 브레히트를 오늘 날로 살려내는 것도 함께 잘 되었으면 좋겠다. 왠지 이자람님이 멋지게 해주실 것 같아! 기대기대 @.@ 아무튼, 오랜만에 공연봐서 너무 좋았고, 이자람님 공연이어서 더욱 좋았고, 브씨 아저씨 이야기도 좋았고. 이 공연 강추!!! 아쉽게도 7/11을 마지막으로 끝났는데, 10월달에 전주소리축제에서 다시 한 번 한다고 하니, 땡기는 분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